이전 글에서 언급했듯이 영국 헌법의 법원法源 (Sources of the UK Constitution)은 크게 다음의 4가지로 나누어 구성된다. 이번 글에서는 두 번째, 법원에서 생산되는 판례법 Case Law에 대해 알아본다.
- 의회가 제정하는 제정법 (Acts of Parliament)
- 법원에서 생산되는 판례법 (Case law)
- 국왕 (The Crown)이 고유하게 보유하는 권한, 특권, 면책권의 총체를 의미하는 국왕대권 國王大權 (The Royal Prerogative )
- 헌법적 관습 (Constitutional conventions)
Case Law 판례법의 헌법적 기능
영국 헌법의 다양한 법원法源 가운데 판례법 Case Law은 헌법적 원칙들의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영국의 사법부는 판례법을 통해 영미법계의 특징인 Common Law 보통법주의에 근거한 개인과 국가 간의 관계를 정의해 왔다. 또한, 행정부에 대한 사법심사 Judicial Review를 통해 영국 헌법 체계의 민주적 정당성과 법치주의를 보장하고 있으며, 의회가 제정한 법률을 해석 Interpretation of Statute 하여 헌법적 권리를 보장하고 국가 권력의 한계를 결정해 왔다.
The Common Law (보통법)
보통법은 개인의 자유와 국가 권력의 한계를 규정하는 기초를 마련한다. 보통법의 가장 핵심적인 원칙 중 하나는 Residual Freedom 잔여적 자유이다. 이는 법이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는 한, 시민은 자유롭게 행동하거나 발언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개인의 권리는 ‘허락 받은’ 범위가 아니라 ‘제한 받지 않은’ 범위에서 인정된다.
반면 국가 권력은 그 반대 구조를 따른다. 즉, 경찰이나 공무원과 같은 국가 기관은 반드시 법률적 근거가 있어야만 정당하게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국가의 행위는 반드시 법률적 근거를 가지고 행사되어야 하며, 정당한 법률적 근거를 갖지 않은 공권력은 개인의 Residual Freedom을 침해하므로 보통법에서 위법한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정부 관리들이 영장 없이 개인의 주거지를 수색하고 문서를 압수하는 행위는 불법으로 판결된다. Entick v Carrington (1765) 19 St Tr 1030
보통법은 권력 분립 Separation of Powers의 원칙과도 직결된다. 역사적으로 영국 법원은, 사법 기능은 사법부에 속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국왕 및 정부 관료들이 개입하여 직접 법적 분쟁을 판결하려는 시도들을 봉쇄해 왔다. Case of Prohibition (Prohibition del Roy) (1607) 12 Co Rep 63
개인의 자유 보장과 관련하여 보통법 Common Law는 Habeas Corpus (인신보호 및 영장주의) 원칙을 지지한다. 국가가 한 개인을 구금할 경우 그것이 적법한 근거를 가진 것인지 여부를 사법부가 심사하고, 만약 적절한 근거가 없다면 즉각 석방해야 한다. 이 원칙은 현대에도 꾸준히 적용되어 왔다. 예를 들어, 아무리 테러 혐의자라 하여도 합법성에 대한 심사 없이 무기한 구금하는 것은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 Belmarsh Case [2005] 2 WLR 87 아울러 공정한 심리 Fair Hearing를 받을 권리도 보통법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의회주권議會主權 Parliamentary Supremacy의 원칙 역시 보통법을 통해 확립되었다. 입법부, 즉 의회가 법률을 제정하여 입법 명부 Parliamentary Roll에 기록하면, 법원은 해당 법률의 유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거나 무효라고 선언할 수 없다는 원칙이 다양한 판례들을 통해 확인되었다. Edinburgh & Dalkeith Railway v Wauchope (1842) 8 C1&F 710 & Pickin v British Railways [1974] AC 765
Judicial Rreview 사법심사
권력 분립 Separation of Powers 및 의회주권議會主權 Parliamentary Supremacy의 원칙에 따라 영국 법원은 의회의 입법 행위나 의회가 제정한 법률의 유효성을 심사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 즉, 영국 사법부는 한국의 헌법재판소처럼 법률의 합헌성을 직접 판단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법원은 행정부가 의회로부터 부여 받은 권한을 어떻게 행사하는지, 즉 행정부의 행정 행위에 대하여 심사할 권한을 가진다.
그러한 사법부의 권한을 Judicial Review 사법심사라고 칭하며, 영국 헌정 질서에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권력 분립의 원칙을 존중하면서 행정 권력이 남용되지 않도록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의회주권議會主權 Parliamentary Supremacy을 더욱 강화한다.
법원의 Judicial Review는 크게 세 가지 사항을 살펴본다. 첫번째로, 행정부의 행위에 권한의 범위를 벗어난 초과 행위 Ultra Vires가 있는지 여부다. 행정부 및 정부 기관은 의회가 부여한 법률적 근거에 따라야 하며, 이를 벗어난 ‘초과’ 행위는 무효로 선언될 수 있다. 두번째로, 행정부의 행위에 절차적 정당성 Procedural Fairness가 존재했는지 여부다. 공공기관이 결정을 내릴 때 법률이 정한 적절한 절차를 준수하지 않았다면, 그 결정은 위법하다고 판단된다. 예를 들어 이해관계자에게 의견 제출 기회를 주지 않거나 공정성을 해칠 만한 편견이 개입된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세번째로, 행정부의 권한 행사가 합리적이거나 Reasonable 비례적 Proportional이었는지 여부다. 행정 결정이 불합리하게 과도하거나 목적에 비해 불균형적일 경우, 법원은 그 결정이 위법하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보건 당국 간의 권한 행사에 관한 분쟁이 발생한 St Helen Council v Manchester Primary Care Trust [2008] EWCA Civ 931 사건에서 영국 법원은, 공공기관이 의회로부터 위임 받은 권한을 남용하거나 잘못 행사하는 경우는 Judicial Review의 대상이며 법원이 그 권한 행사의 위법성 여부를 심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같은 방식으로 Judicial Review 사법심사 제도는 국가 권력이 자의적으로 행사되는 것을 방지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동시에 이는 의회의 입법권과 조화를 이루며 의회의 주권을 부정하지 않는 범위에서 행정권에 대한 통제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사법부의 Judicial Review 사법심사는 영국 헌법 체계에서 민주적 정당성과 법치주의를 보장하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이다.
Interpretation of Statute 법률 해석
의회가 제정한 제정법에 대한 법률 해석 Interpretation of Statute도 영국 헌법에서 Case Law 판례법이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이다. 불문 Unwritten 헌법의 특성과 의회주권議會主權 Parliamentary Supremacy의 원칙에 의해, 의회 제정법 (Acts of Parliament)들이 헌법적 지위를 갖게 되지만, 실제 해당 법률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헌법적 권리 보장이나 국가 권력의 한계가 결정되기도 한다.
법률 해석 Interpretation of Statute에는 세 가지 접근 방법이 존재한다. 법률을 문구 그대로 기계적으로 해석하는 문언적 해석 Literal rule을 적용하거나, 법률이 추구하는 목적 혹은 입법부의 제정 의도를 고려하여 해석하는 목적론적 해석 Purposive approach을 하거나, 문언적 해석 Literal rule을 적용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불합리한 모순을 피하는 방향으로 유연한 해석을 허용하는 황금률 Golden rule 방식 등을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법원의 법률 해석 과정은 단순한 법률 적용을 넘어 그 자체로 헌법적 의미와 결과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국이 유럽연합 EU 회원국 지위에 있을 당시, 유럽연합법 EU Law와 영국 국내법이 충돌하는 경우 의회가 제정한 국내법의 적용을 제한하는 판결이 내려졌다. Factortame Case [1991] 1 AC 603 이 판례는 영국의 의회주권議會主權 원칙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방식으로 영국 사법시스템과 유럽연합법 EU Law 사이의 관계를 정의했다.
법원은 판례법 Case Law을 통해 제정법 규정의 해석 방법을 정하여 개인의 권리 보장 범위를 법률적으로 확정하기도 한다. Ghaidan v Mendoza [2004] 3 All ER 411 이 사건에서 법원은 의회가 제정한 Rent Act 1977의 ‘부부 관계’ 라는 표현에 대하여 이성 간 부부 뿐만 아니라 동성 파트너도 포함한다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평등권과 인권이 보장되는 범위를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법원이 생산하는 판례법 Case Law은 의회가 제정한 법률들 간의 위계 Hierarchy를 정하는 역할도 한다. Thoburn v Sunderland Council [2002] 4 All ER 156 이 판례에서 법원은 의회가 정한 제정법 Statue들을 일반 법률 Ordinary Statutes과 헌법적 법률 Constitutional Statutes로 구분하였다. 헌법적 법률은 국가의 기본 질서, 권리 보장, 정치 체계의 구조와 같은 근본적 요소를 규정하는 법률로서, 후속 입법에 의해 암묵적으로 폐지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즉, 명시적이고 분명한 규정 없이는 헌법적 법률이 무효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구분은 성문헌법이 존재하지 않는 영국에서 헌법적 위계 질서를 마련한 판례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
이와 같이 판례법 Case Law은 영국 헌법의 중요한 법원法源으로서, 개인의 자유 보장, 국가 권력의 제한, 그리고 헌법적 법률 체계의 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